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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1화

core Sponges 74

라면 냄새가 지독했다. 코끝을 찌르는 기름 냄새와 말라붙은 파의 흔적, 그리고 무심하게 벽에 붙어 있는 울긋불긋한 메모들. 나는 비몽사몽한 머리를 흔들며 천천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이 싸구려처럼 깜빡였다. 잠깐만, 여긴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다, 뭔가 묵직한 게 목 언저리에 스쳤다. 갑옷이 아니라—후드 집업? 손끝엔 헐렁하고 얇은 천 조각만이 만져졌다. 허벅지엔 싸구려 스판 바지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이지?’

왼손을 들어 가볍게 움켜쥐었다. 무거운 검뚜껑 대신, 내 손에 쥐인 건 벽에 나붙은 노란 쪽지 한 장. ‘방 청소하기’. 어이없게도, 검 대신 쪽지를 휘둘렀다. 전혀, 아무 효과도 없다.

“이봐, 시스템.” 주변을 둘러봤다. 허름한 책상 위엔 키보드, 모니터, 그 옆으론 형체를 알 수 없는 조각상과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화려한 전장, 불길한 긴장감, 금속성 피 냄새는 온데간데없다.

냄새는 오로지 삼양 라면뿐.

내 뒤로 뭔가 스멀스멀 꿈틀대더니, 모니터 화면에 눈길이 갔다. 게임 속 내 모습—강인한 여전사, 네온—여전히 그곳에 갇혀 있다.

‘나… 퀘스트 수행 중… 맞지?’

이유 없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좋아… 당황해봤자 소용없지.”

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 방을 스캔했다. 침착하게, 정보 수집부터.

문 앞에는 잔뜩 쌓인 박스, 그 위에는 식은 컵라면 용기 셋. ‘쓰레기 버리기’라는 또다른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일부러 퀘스트 단서를 남긴 듯한… 하지만 뭔가 형편없다.

벽엔 그림들이 빼곡했다. 만화 캐릭터, 의문의 로봇, 사람 얼굴에 하트가 뒤엉켜 있었다. 그 밑에 또 다른 쪽지: ‘물건 정리’, ‘게임 대회 신청’, ‘알람 맞추기’…

이런 게 퀘스트라니, 농간도 정도껏이어야지.

나는 조심스럽게 책상 앞으로 다가가, 마우스를 꼬집듯 집어 올렸다. 혹시 이걸로 무기를 뽑는 건가—단단한 검 손잡이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촉감에 다시 한 번 허탈하게 미소가 새어나왔다.

“관찰, 정보 분석, 임무 목록 파악…”

기억 속 시스템 음성을 흉내내며 중얼거리는 내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그래도, 무채색 현실에서 퀘스트를 만들어 가는 건 내 몫이니까.

문득—뒤쪽에서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이곳의 몬스터는 대체 어떤 형태일지, 내 검 없이도 이길 수 있을지.

하지만 고요했다. 주방 쪽에서, 한동안 물이 흐르는 소리만 미적거리다 꺼졌다.

나는 천천히 손톱을 세워 가며, 벽 쪽의 포스트잇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내일까지 과제 제출’

‘편의점에서 우유 사오기’

‘분리수거’

읽으면서 어이없는 한숨이 나왔다.

“이런 게 퀘스트라고? …흠.”

한편으론, 살짝 웃음도 났다. 어쩐지 뭔가 허술하고 인간적인 이 미션들이 싫지 않았다. 네온이라는 이름을 잠시 숨긴 채, 나는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갑옷을 잃고 검도 없이, 싸구려 냄새에 젖으며.

‘…이게 현실퀘의 시작인가.’

강한 마음으로, 어처구니없는 이 세계의 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리 우스꽝스러워 보여도—퀘스트라면, 내가 정복할 수 없는 건 없지.

그리고, 결코 모를 일이다. 벽 너머, 어둠 속에서는 시스템의 눈 하나가 조용히 깨어났다.갑작스레 문이 삐걱 소리를 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목까지 올라간 심장을 겨우 달래며 시선을 돌렸다. 방 안을 가로지르는 온갖 빛깔의 포스트잇 잔해들이 내 무릎 위에 쌓여 있었다. 몇 장은 바닥에 흩어지고, 몇 장은 손에 고이 쥐어졌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더없이 어색한 풍경이다.

“어… 저기요?”

낮고 소심한 목소리. 나는 문 쪽을 노려봤다. 문 사이로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머리는 덥수룩하게 헝클어진 남자가 고개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예상하던 퀘스트 몬스터는커녕, 그냥 동네에서 마주칠 법한 흔한 대학생이다. 그 남자—시헌—내 색다른 퀘스트의 첫 NPC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잠깐 얼어붙었다. 내가 바닥 한가운데, 포스트잇을 손에 쥐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크게 이상해보였을 것이다.

“…누구시죠…?”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평소처럼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온. 퀘스트 수행 중. 여기는… 시스템의 오류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스스로도 말이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시헌의 얼굴엔 금세 당황과 경계심이 드러났다.

“…네온요? 저…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

나는 그의 주위를 한 번 훑었다—책상 위에 쌓인 만화책, 먼지 낀 피규어, 방안 구석에 엉켜 있는 전선더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익숙한 삼양 라면 향.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편해졌다.

시헌은 어색하게 멀찍이 서서 뭔가를 망설였다. 나는 손에 쥔 포스트잇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네 퀘스트 아니야? ‘방 청소하기’ ‘쓰레기 버리기’ ‘과제 내기’…”

무심하게 쏟아내자, 시헌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건 그냥… 저 혼자 챙기려고…”

“퀘스트면 무조건 클리어해야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안의 뭔가—몇 번의 전장을 헤쳐 온 결의 같은 것이 다시 불붙는 기분이었다.

시헌은 내 표정에서 단단함을 읽은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셋, 넷, 다섯 번 흐르고,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진짜… 안 무서우세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불현듯 내 뒤에서 또다시 형광등이 번쩍였다. 그 불안한 깜빡임 사이, 어렴풋이 내게도 ‘이곳’이 아직 온전히 익숙지 않다는 사실이 밀려왔다.

나는 조심스레 시헌 쪽으로 다가갔다.

“이 세계의 몬스터들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

농담 반 진담 반,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지만—내 속마음은 진지했다. 어쩌면, 여긴 정말로 불시에 변하는 던전일지도 모르니까.

시헌이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몬스터요…? 글쎄요, 제일 무서운 건… 내일까지 마감인 과제?”

그의 농담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색하고 희한한 공기가 방 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잠깐—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딘가 먼지 속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남은 마지막 쪽지를 슬쩍 집었다.

노란 잉크로 삐뚤빼뚤 쓰인 한 문장.

‘진짜 퀘스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미세한 소름을 느끼며 쪽지를 바라보았다.마지막 쪽지의 글자가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종이의 가벼운 질감과 대비되게, 저 따옴표 없는 한마디가 낯선 무게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나는 쪽지를 슬쩍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그냥 평범한 포스트잇, 시헌의 조잡한 볼펜 자국뿐.

‘이상하네…’

내가 무언가에 홀린 듯 쪽지를 만지작거릴 때, 시헌이 조심스레 다가오며 물었다.

“…그거, 뭐예요?”

나는 언뜻 그를 바라봤다. 불현듯, 방 안을 맴도는 공기가 한층 더 낯설게 느껴졌다.

“여기 있잖아. ‘진짜 퀘스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너가 쓴 거야?”

시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쪽지는 내가 안 썼는데…”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찌르르—알람 같은 전자음이 울렸다. 두 사람 모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컴퓨터 모니터 위 작은 디지털 시계가 깜빡이며 숫자를 바꿔댔다.

“8:05, 기상 알람…”

시헌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알람 소리는 평소보다 길고 불분명하게 울렸다. 마치—숨죽인 듯 늘어진 끝부분.

나는 쪽지를 꼭 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이거, 네 장치 소리 맞아?”

“글쎄요, 좀 다른데… 오늘은 알람 음을 설정한 기억도 없는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방안을 훑어보았다.

형광등은 여전히 느리게, 불길한 박자로 깜빡이고, 벽에 붙었던 쪽지들은 이제 내 무릎과 손에 산뜻하게 쌓여 있었다. 그 틈으로, 미묘한 긴장감이 물 아래 숨은 물고기처럼 슬며시 퍼졌다.

나는 덜컥, 문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러니까… 네가 직접 쓴 게 아니면, 이 쪽지는 누가 남긴 거지?”

시헌은 머리를 천천히 긁적이며 어물거렸다.

“…혹시, 최근에… 우리 방에 누가 다녀갔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 일단, 방금까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

그 순간.

형광등 아래, 내 뒤편 벽에 붙은 포스트잇 한 장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침 소리마저 느껴지는 적막 속, 우리는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 쪽지에는 또 다른 삐뚤빼뚤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퀘스트의 진실을 보고 싶다면—’, 그리고 그 밑에, 불분명한 이상한 상징 하나.

심장이 둔탁한 북소리처럼 뛰었다.

바로 그때였다.

낯선 진동음과 함께, 모니터 화면이 갑자기 푸른 불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접근 불가한 시스템 메시지 감지—’

나는 얼어붙은 채, 시헌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건… 네 시스템 문제야?”

하지만 이번엔, 대답보다 먼저 차가운 전자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삐—익, 삐이—익, 삐—익.

마치 해킹 경고음처럼, 기계음이 불규칙하게 퍼졌다. 컴퓨터 화면은 거짓말처럼 파랗게 물들고, 익숙한 바탕화면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오류창들이 미친 듯이 쏟아졌지. 수십 줄의 코드가 춤추듯 깜빡이고, 화면 중앙엔 새까만 물결이 꿈틀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시헌은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이런, 왜 이러지…?”라고 중얼거렸다. 그 사이 화면 한쪽에 희미하게 번지는 문장.

[시스템 오류—외부 신원 미확인 접속 시도. 규약 위반]

파란빛에 잠식된 방 안이 마치 낯선 던전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시스템… 이거, 이벤트냐?” 나는 긴장과 의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러나 전혀 반응이 없다. 오직 기계음만 덧없이 울려 퍼지고, 어느새 컴퓨터 스피커에서 뭔가—희미하게, 워낙 낮고 불분명해서 확신할 수 없는—낯선 속삭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헌이 다급하게 마우스를 흔들었지만, 화면은 그대로 먹통.

“이상하다, 재부팅도 안 돼… 진짜 왜 이래…”

그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흰빛 아래 날카롭게 드러난다.

나는 모니터 가까이 한 걸음 다가섰다. 화면 속 유령 같은 커서가 일렁이며 마치 ‘도망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잠깐, 화면에 아르카디아 게임 로고가 흐리게 떴다가 사라진다.

“혹시… 네온 씨, 방금 그 쪽지—거기 있던 기호, 기억나요?” 시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인 채, 손에 쥔 쪽지를 펼쳐 그 어설픈 상징이 제대로 보이게 들이댔다. 그것은 무언가를 흉내 내다가 망가진 인장 같기도 했고, 이상한 열쇠 구멍—혹은 뒤틀린 나선 같기도 했다.

시헌은 안경을 밀어올리듯, 얼굴을 잔뜩 찌푸려 “내가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급히 자신의 스마트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현관 쪽을 흘끗 봤다. 어쩐지 이 방 어딘가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지금 막 깨어나려 하는 듯, 공기가 점점 차갑고 묘하게 압축되었다. 그 와중에도 형광등은, 불길하게, 규칙 없이 깜빡였다.

파란빛 아래, 우리는 각자 다른 호흡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시스템의 씁쓸한 냄새, 어설프고 삶의 기운이 어지러운 현실. 그 한복판에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모니터 한쪽에 떠올랐다.

[퀘스트1: 현실의 던전에서, 정해진 시간을 지켜라.]

“뭐야, 이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진다.

바로 그때, 부엌 쪽에서 또 한 번— 작은 ‘철컥’ 소리가 들려왔다.

시헌도, 나도 동시에 그 방향을 바라봤다.

정확히, 거기서부터—이야기는 새로운 한 걸음을, 조용히 시작하고 있었다.우리는 본능적으로 멈췄다. 너무나 익숙해야 할 평범한 주방에서 흘러나온 그 쿡 찌르는 소리에, 숨마저 잠시 갇혔다. 내가 쥔 쪽지 모서리가 손가락 끝에 살짝 접힌다. 시헌은 스마트폰 화면을 향해 굳은 채, 힐끔 내 움직임을 살폈다.

“혹시… 고양이 같은 거 키워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머릿속은 이미 수십 가지 몬스터 혹은 보스 출현의 시나리오로 점철돼 있었다.

시헌은 두 번쯤 눈을 깜박였다. “고양이도, 강아지도, 아무것도… 없어요. 네온 씨가 처음이에요, 제 방에 들어온 생명체는.” 뭐가 어색했는지 마지막 말을 삼킨다.

그 순간,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을 향해 숙련된 움직임으로 발을 옮겼다. 갑옷도 검도 없지만, 몸 어딘가엔 아직 전장의 본능이 남아 있다. 반면, 시헌은 뒤에서 나지막이 따라왔다. 두 발 놀림이 조심스러워 문지방마다 먼지가 부스럭거릴 정도였다.

주방 문틈 사이에서 쿵, 또 한 번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손가락 너머로 문틈을 살짝 밀었다.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는데, 방금까지와 달리 부엌 안이 묘하게 어두웠다. 단 하나, 전자레인지 위의 초록색 디지털 시계 숫자만 이질적으로 빛났다.

“저기… 아무도, 없죠?” 시헌이 불안하게 속삭였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식탁 위에는 반쯤 마른 컵라면 용기 하나와, 헝클어진 비닐봉지. 바닥에는 이상하게 뒤집힌 슬리퍼 한 짝. 마치 누군가가 재빠르게 거기 있었다는 흔적처럼, 아무것도 아닌데도 온 신경이 곤두섰다. 심장 소리가 더 확연히 들렸고, 등줄기를 타고 왠지 모를 한기가 스쳤다.

다시 전자음—삐이이— 더 날카롭게 울렸다. 동시에 스마트폰 화면에, 시헌이 검색하던 어떤 사이트가 강제로 꺼져버렸다. 화면 위에 검은 창이 깜빡이며, 뻗어나온 선들이 방금 봤던 그 기호처럼 나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주방 문 앞에 멈춰선 채, 속삭이듯 말했다. “…이상해. 그냥 이벤트라기에는, 뭔가가 너무 직접적이야.”

시헌은 깨달은 듯 입을 다물고, 조용히 내 옆에 붙었다. 방 안은 점점 더 푸른 기운에 파여들고, 형광등 불빛도 흔들렸다.

내 손엔 여전히 그 삐뚤빼뚤한 상징의 쪽지가 붙잡혀 있었다. 나는 어딘가에서, ‘한 번만 더—퀘스트 시작 조건을 충족하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성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부엌 깊은 곳 어딘가, 어둠이 숨죽인 채 우리를 틈입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시헌,” 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반쯤 농담처럼, 반쯤은 전장의 결의로, “설마, 이 집… 던전 초입 아니겠지?”

시헌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이 찔러넣으며 한숨을 훅 내쉰다. “진짜… 오늘, 현실 세계에 뭐가 잘못된 거 맞죠?”

내가 준비 없이 다가올 다음 신호에, 기묘한 설렘과 불안 사이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주방 어디선가 툭—하는 작은 충돌음이 다시 한 번, 이 기묘한 퀘스트의 신호탄처럼 터졌다.이번에는 작은 금속성 울림이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바로 식탁 저편쯤에서 나는 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문틈 너머 어둠 속으로 시선을 뻗었다. 감지된 건 단순히 멈춘 공기, 식은 라면 냄새, 비닐 포장지의 미세한 흔들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적막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작은 낌새가 확실히 있었다.

시헌은 숨죽인 채 내 뒤에 바짝 붙었다가, 의식을 했는지 한 뼘 정도 거리를 뒀다. 그의 손등이 살짝 떨리는 게 마치 이 공간의 긴장감과 동기화된 느낌이었다.

“음… 거기, 초록 전자시계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시헌이 더듬더듬 말을 걸었다.

나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주방불은 어째서인지 켜지지 않았고, 초록 전자시계의 미약한 빛만이 어렴풋이 공간을 부유했다. 방금 떨어진 슬리퍼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 내 발끝에 무언가 부드럽게 맞닿았다. 움찔, 본능적으로 손에 든 쪽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전자레인지 패널이 찰칵—하고 수동 조작당한 듯 소리를 내며 짧은 불빛을 내뿜더니, 곧바로 화면이 새파랗게 번쩍였다. 순간적으로 주방 벽면에 있던아르카디아의 로고가 거꾸로 뒤집힌 채 비쳤다. 그 위로 퍼져오는, 기이할 만큼 차가운 소음과 가느다란 기계음.

나는 잽싸게 시선을 굴려 전자레인지 쪽을 주시했다. 그런데 렌즈 표면, 손바닥만 한 화면에 아까 봤던 상징이 또렷이 떠오르고 있었다. 푸른빛이 바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나오며, 식탁 가장자리까지 밝힌다. 마치 게임 속 던전의 트리거가 발동된 것 마냥—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헌은 한 손으로 내 뒤에 팔을 대며 힘없이 속삭였다. “저거, 진짜… 저희 집 물건 아닌데요. 저런 패턴, 원래 뜨지 않아요…”

전자레인지 화면엔 이제 숫자 대신, 번들거리는 나선과 암호문 비슷한 것들이 엉켜 춤을 추었다.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그 긴장감에, 등줄기를 타고 희미한 소름이 퍼졌다.

나는 곧장 외쳤다. “시스템! 퀘스트 시작 조건 충족. 다음명령을 공개하라!”

그러나 어디에도 시스템 음성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화면 속 기이한 나선이 서서히 팽창하며 주방 벽에 흐릿한 그림자를 던졌다. 파란빛에 물든 부엌은 더 이상 평범한 대학생의 살림집 같지 않았다. 쟁반 위의 젓가락이 덜컥, 저절로 구르다 멈췄다. 마치 보는 이를 시험하듯, 사물이 하나 둘 어스름에 잠긴다.

숨소리가 무겁게 방 안을 맴돌았다. 셋, 넷, 다섯 걸음 거리 — 나는 주먹을 쥔 채 이질적인 조명 속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벽 틈새, 전자레인지 밑에 깔린 검은 그림자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마치, 누군가 곁눈질로 지켜보는 듯한 착각.

시헌도 눈을 크게 뜬 채 화면과 식탁을 오갔다. 그의 손끝이 불안하게 떨렸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속삭임 같은 노이즈가 저 멀리서 스멀스멀 번져온다.

“이거… 진짜 이벤트 아니에요? 저, 원래 게임 이런 식으로 현실에 연결되는 거 아니죠…?” 그가 다급히 묻는다.

“나도 몰라. 하지만—” 나는 쪽지를 살짝 쥔 손에 힘을 준다. “퀘스트라면, 여기서 도망치지 않는다. 규칙이 뭐든, 맞서서 해치워야지.”

파란 나선이 조그맣게 깜박이다가, 전자레인지 위에 떠오르는 새로운 메시지.

[퀘스트1: 던전의 첫 관문—진실을 밝혀라.]

일순간, 형광등이 번득이며 한 번 세차게 깜빡였다. 그와 동시에 식탁 밑에서 또 다시, 부드럽게 비닐봉지가 흔들렸다. 작은 손 같은 무언가가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공기가 멎는 듯, 두 사람 모두 그 움직임에 짧게 숨을 삼켰다.

“방금… 뭔가 지나가지 않았어요?” 시헌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나는 대답 대신 주방 바닥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먼지와 빛, 그리고 기묘하게 퍼지는 아르카디아 로고의 흔적. 그 순간, 내 발밑에서 삐걱 소리와 함께 작은 그림자 실루엣이 다시 번져 나왔다.

“준비해.”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시헌은 무심코 숨을 꾹 죽였다.

파란 나선은 이번엔 전자레인지 패널을 따라 볕처럼 번져, 천천히 ‘첫 열쇠를 찾아라’는 이상한 글자를 그렸다. 깜빡이는 빛마다 방안의 모든 사물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아주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둠과 푸른 조명이 교차하는 식탁 너머.

나는 타고난 전사의 예감으로, 아주 작은 무언가의 존재를 또렷이 감지했다.

아직, 진짜 퀘스트의 첫 퍼즐이 세상의 구석에서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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