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묵직한 가방Heavy bag
세상을그리다.
화방 문은 생각보다 조용히 열렸다. 엊그제, 쏟아지듯 몰려와 사진을 찍던 그 애들이 오늘은 어색한 인삿말도 없이 작은 종이백들을 들고 묵직하게 들어섰다. 강한 햇살에 데워진 먼지 냄새와 싸한 커피향, 젋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선생님, 오늘은 화방 주변도 한번 둘러볼까 해서요.” 아슬아슬하게 다부진 단발머리의 민섭이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 나탈리아가 익숙하게 내 앞치마 자락을 잡아당겼다.
“재만 씨, 약속! 오늘 도시의 조각, 그거… 같이 찾자고 했어요.” 그녀 목소리에 카메라 끈이 쿵 하고 내 허벅지를 쳤다. 어색한 한국어, 그러나 망설임 없는 눈빛—내가 뭐라 한 마디라도 하면 그건 또 작품이 될 것 같은 기세였다.
“여기 벽 낙서, 좀 봐주세요.” 나탈리아가 낮게 웃으며 골목 담장 밑을 가리켰다.
나는 그쪽으로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몇 년째 깨지 못한 유리조각, 누군가 발로 차서 달아난 초록 알약 껍질, 지워지지 않은 분홍분필 선. 낙엽집회소 카페 쪽에서 흘러 들어온 재활용 박스 사이로 찢긴 종이 한 장이 바람에 휘청였다. 아이들이 쓴 초등학생 글씨체.
“‘진짜 용감한 사람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구 글씨래요?” 나탈리아가 카메라로 그 문장을 확대해 담으며 묻는다.
“글쎄… 예전에 초등학생들 데리고 소방안전 교육한다고 이런저런 이야기 했을 때 써놓은 모양이지. 그 뒤로 계속 남더라, 아무도 지우질 않네.” 나도 모르게, 그날 그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행여 티라도 날까—I just shrugged.
학생들은 각자 손에 작은 공책과 녹음기를 들고, 화방을 전후좌우로 훑었다. 난 그 모습을 문 옆에 서서 지켜봤다. 낙엽집회소 카페 쪽에서는 파란머리의 정우가 잠깐 주인아주머니와 인사한다. “여기 학생들, 오늘 뭐 하려고요?” 불쑥 날아오는 목소리.
나는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이 사람들이 도시의 기억 찾는다카네, 그냥 시끄러우면 미안하이소.”
아주머니 표정이 아주 잠시만 점잖았다가, “에이, 젊은 사람들 모이는 건 좋은 일이지. 근데, 동네 어른들은 좀 예민하니까…” 하며 슬그머니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나탈리아가 이 와중에 내 옆에 바짝 붙어, 카메라 화면을 내민다. “선생님, 여기—벽에 낡은 전단지, 직접 보셨어요? 1998년 소방의 날 축하 행사… 사진에 재만 씨 젊은 얼굴도 있어요.” 정말이지, 세월도 귀신이지. 오랜만에 보는 그 시절 내 얼굴이 저만치 작게, 구겨진 전단지 한쪽 모서리에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전단지 곁의 낡은 캠페인 스티커를 슬쩍 만졌다. 그 시간과 지금의 거리. “저건, 그 해 겨울에 큰 화재 있었지. 시에서 소방관 표창 받아온 날이라, 동네 사람들이 포스터 붙여줬다.” 따져보면 별일도 아닌데,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나탈리아가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고선 낮은 목소리로 쿡 찔렀다. “이것들이—재만 씨 그림 속, 불길에서 구한 얼굴들하고 연결돼요? 그냥… 제 느낌이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화방 옆 창틀에 손을 얹었다. 골목길로 햇살이 스며들고 녹슨 표지판 그림자, 거기 새겨진 ‘수입화방’의 옛 한자체. 손끝으로, 오래된 물감 냄새와 희미한 소리들—누군가의 발자국, 장난기 어린 속삭임, 그리고 내가 잠깐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들.
학생들은 카메라 플래시, 연필 소리, 그리고 떨어진 낙엽을 테이블 위에 펼치고, ‘기억의 불씨’ 프로젝트를 위한 키워드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형, 화분 속에서 오래된 편지 한 장 찾았어요. 아마 누가 두고 간 것 같아요.” 저쪽 구석에서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종이를 폈다.
“재만 씨, 읽어도 돼요?” 나탈리아가 내 쪽을 본다.
나는 잠깐 눈을 마주치다 고개를 내저었다. “읽어봐라. 딱히 내 것도 아니다.”
나탈리아가 조심스럽게 또박또박 읽었다. “‘불씨 삼촌, 오늘도 도와줘서 고마워. 엄마랑 다시 잘 지내게 됐어요.’ …아마 옛날에 이 골목 누군가 쓴 거겠죠?”
내 손끝이 저도 모르게 부서진 화분 흙을 문질렀다. 그 말 한 줄이, 세상에서 내가 아주 잠깐 의미 있었던 순간처럼 느껴졌다.
학생들이 작은 목소리로 서로 의견을 나눈다. “이런 조각들을 모아서, 전시 때 카페랑 화방 여기 골목까지 연계하면 어때?” “기억의 불씨… 도시의 시간, 사람의 시간 같이.”
밖에서는 어디선가 윤지수 교수의 굽 높은 구두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차가운 회색 그림자가 그림자처럼 골목 가를 스쳐갔다.
나는 무심한 척, 문틈에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봤다. 학생들의 수선스러움, 그리고 문앞에 그어진 얇은 빛줄기. 뭔가 달라지기 전의 오후. 이 도시, 이 골목, 그리고 나.
“재만 씨, 같이 움직여도 돼요? 이 골목, 같이 둘러보고 싶어요.” 나탈리아가 살짝 웃는다.
나는 짧게 “따라오이소” 하고, 골목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공에 섞인 모든 소리와 빛, 그리고 다시 쌓일 오늘의 흔적들을, 그저 조용히 받아들이듯이.

2. 조그만한 작업실안에...Quiet Workshop...

4 장재만 씨 추억을담다 . Jang Jaeman Capturing Memor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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