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ot Synopsis
7년간의 연애 끝에 찾아온 권태기. 조향사 윤이서에게 연인 오승준은 더 이상 어떠한 영감도 주지 못하는, 그저 익숙하고 편안하기만 한 향이 되어버렸다. 승준 역시 반복되는 회사 생활의 무력감 속에서 이서의 섬세한 감정을 더는 헤아리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관계의 위기를 직감한 이서는 마지막 희망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바깥세상의 한 달이 섬에서는 단 하루와 같다는, 오직 한 쌍의 연인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신비로운 섬. 이서는 그곳이라면 잃어버린 감정의 향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승준은 비논리적인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이서의 절박함에 이끌려 동행을 결심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낡은 연락선을 타고 안개에 휩싸인 미지의 섬, '크로노스'로 향한다. 그들은 섬의 유일한 관리인이자 선장인 노인에게 "섬에서의 시간은 당신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대가로 흘러간다"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듣지만, 사랑을 되찾고 싶은 열망에 가려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섬에 도착한 첫날, 이서와 승준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비현실적인 풍경에 압도당한다.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와 울창한 원시림, 그리고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작은 오두막. 세상의 모든 소음과 의무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공간에서 두 사람은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기 시작한다. 승준은 회사와 업무를 잊고 다시 예전처럼 이서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귀 기울였고, 이서는 그런 승준의 모습에서 잊고 있던 설렘의 향기를 다시 맡게 된다. 함께 해변을 거닐고, 숲을 탐험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7년 동안 쌓아왔던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이서는 섬의 야생화로 승준을 위한 향수를 만들고, 승준은 서툰 솜씨로 이서를 위한 나무 반지를 깎는다. 섬에서의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기적처럼 회복되는 듯 보였다. 바깥세상에서는 이미 몇 달이 흘렀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은 행복 속에서 두 사람은 섬이 주는 시간의 선물을 만끽한다.
하지만 섬에서의 시간이 한 달쯤 지났을 무렵(바깥세상에서는 2년 반이 흘렀다), 이서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분명 어제 승준과 나누었던 소중한 대화의 일부가 안개처럼 흐릿해지고,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감정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섬의 나른한 분위기 탓이라 여겼지만, 기억의 공백은 점점 더 잦고 커져만 갔다. 불안해진 이서는 섬의 지질학적 특성을 연구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유일한 외부인, 한국계 영국인 지질학자 노아 해밀턴에게 자신의 증상을 털어놓는다. 노아는 섬의 특이한 자기장이 인간의 뇌, 특히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그는 섬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섬의 자기장이 외부 세계와의 시간적 동기화를 교란시키며 그 대가로 기억 데이터를 조금씩 '소모'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랑의 기억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기억이 서서히 사라질 수 있다는 끔찍한 진실이었다.
노아의 가설은 곧 현실로 증명된다. 승준 역시 최근의 기억들이 뒤죽박죽 섞이거나 통째로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섬은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축복의 땅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을 연료 삼아 시간을 왜곡하는 잔인한 포식자였던 것이다. 이서에게 후각적 기억은 그녀의 삶 그 자체였기에, 사랑했던 순간의 향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영혼의 일부가 뜯겨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두 사람은 당장 섬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노아는 더 절망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섬의 자기장에 오래 노출된 후 급격히 벗어나면, 마치 잠수병처럼 기억의 급격한 감압 현상이 일어나 섬에서 쌓은 추억은 물론, 서로에 대한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다. 서로에 대한 애틋한 기억과 감정을 간직한 채 서서히 모든 것을 잊어가며 이 섬에 영원히 갇히거나, 혹은 섬을 떠나 서로를 전혀 모르는 타인이 되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선택의 기로에서 이서와 승준은 극심한 갈등에 빠진다. 승준은 이서가 그녀의 재능과 삶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모든 것을 잊더라도 섬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사랑은 이서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었고, 기억 없는 행복이라도 현실 세계에서 되찾길 바랐다. 하지만 이서의 생각은 달랐다. 승준을 사랑했던 기억, 그와 함께 느꼈던 모든 감정의 향기야말로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믿었다. 승준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죽음과 다름없다고 생각한 이서는, 차라리 모든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곁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겠다고 고집한다. 두 사람의 대립은 섬에 오기 전보다 더 격렬하고 처절했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서로에게 가장 잔인한 선택을 강요해야만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들은 밤새 울며 서로를 설득하고 또 원망했다. 이 과정에서 노아는 두 사람의 감정적 혼란을 지켜보며, 자신이 그저 관찰자로만 머물 수 없음을 깨닫고 섬의 자기장을 일시적으로 교란시켜 기억 손실 없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결전의 날, 노아는 섬의 특정 지역에서 지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짧은 순간을 이용하면 자기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골든 타임'이 존재함을 알아낸다. 하지만 성공 확률은 희박했고, 실패할 경우 기억이 즉시 소멸될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이서는 마침내 승준의 뜻을 받아들여 탈출을 결심한다. 떠나기 직전, 그녀는 섬에서 만든 마지막 향수를 승준의 손에 쥐여준다. "만약 우리가 모든 걸 잊게 되면, 언젠가 세상의 끝에서라도 이 향이 당신을 나에게 데려다줄 거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안가에서 노아의 신호에 맞춰 두 사람은 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섬이 멀어짐과 동시에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두 사람은 의식을 잃는다. 몇 달 후, 서울의 한 낯선 거리. 승준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작은 향수 공방 앞에 멈춰 선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익숙하면서도 아련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스친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심한 표정으로 조향 작업을 하던 여자, 이서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승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들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혼 깊숙한 곳에 각인된 사랑의 잔향이 서로를 희미하게 알아본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완전히 새로운 타인으로 다시 만나 서로에게 처음인 듯 끌리기 시작하며 그들의 두 번째 사랑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