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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2화-정하린, 예술과 완벽주의의 갈림길

selee

테이블 위 중앙에 투명한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벽의 향’이라고 커다란 글씨로 적힌 짙은 남빛 라벨이 밤의 잔상을 가득 품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직 커튼을 반쯤 걷은 채, 매일처럼 커피 추출구 앞에 서 있었다. 기계는 아직 예열 단계, 조용히 웅웅거릴 뿐이었다.

하린이 한쪽 구석에 앉아 작은 스케치북 위에 연필을 놀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대충 묶고, 핑크색 셔츠 소매를 두 번 걷은 채 고개를 깊게 숙인 모습이었다. 가끔 시선이 유리병 쪽으로 머뭇거렸다. 연필촉이 멈춘 채, 괜히 마시지도 않은 커피잔을 잡았다 놨다 하는 동작만 반복된다.

소연은 아침 공기보다 더 또렷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공간 전체를 이리저리 다녔다. 그녀의 노트에는 오늘 열릴 작은 북토크 행사 동선과 체크리스트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소연은 전시장에서 테이블 각도를 몇 번이고 오른쪽, 왼쪽으로 조금씩 밀어보았다. 그녀 눈길이 유리병을 가로지르며 나와 하린을 번갈아 훑었다.

짙은 숲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드는 새벽 냄새랄까. 유리병 뚜껑을 살짝 열었을 때, 어젯밤 이슬과 흙을 머금은 풀내음, 그리고 아주 소량의 감귤 껍질이 머무는 냄새가 느릿하게 피어올랐다. 우리는 셋 다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 혼자 한참을 있었던 것 같은데……” 하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 목소리가 서늘하고도 아득했다. “이 향 맡으니까… 괜히 되게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앞에 선 느낌이랄까?”

나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편하기도 하고, 조금 불안하기도 하지? 나도 그래.”

소연이 웃으며 받아쳤다. “오픈 전 분위기가 쓸데없이 진지할 필요 없다니까. 근데… 이 향 때문에 공기가 좀 달라졌어.”

나는 도자기 머그컵들을 꺼내며 조용히 동의를 표했다. 손끝이 의식적으로 느려진다. “이오일커피도 오늘은 조금 다르게 만들어볼까 해요. 새벽의 향이랑 어울릴지 한번.”

마침 밖에서 멀뚱한 얼굴로 창 넘어를 들여다보는 동네 할머니와, 첫 트레이닝복 차림의 단골 문수 형이 보였다. 그들만의 아침 루틴. 아직 문은 잠겨있는데도, 문수 형이 괜히 문고리를 돌려보고, 할머니는 ‘오늘도 커피 맛있을라나’ 하는 눈빛으로 안을 기웃거린다.

하린은 낙서하듯 스케치북에 할머니의 얼굴선을 따라 몇 번 연필을 움직였다. “나중에 초상 그려드리고 싶다. 저 표정, 딱 우리 공간 기다리는 얼굴이잖아.”

소연은 체크리스트에 동그라미를 하나 크게 그렸다. “오늘 북토크 끝나고 분위기 무거워지면, 저분들 불러서 같이 수다 떨면 딱일 것 같은데?”

나는 커피 그라인더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숍 안 풍경을 둘러봤다. 새벽의 향은 빠르게 퍼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한 구석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우리 셋이 자연스럽게 같은 결을 타는 것처럼, 이 냄새가 우리를 묘하게 이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의 정적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바깥 유리창 너머에서 동네 예술가 성환이도 오토바이를 천천히 끌고 온다. 그는 손에 펜을 들고, 멀리서도 하린을 찾아 손을 살짝 흔든다. 하린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나는 커피콩을 더 천천히 계량했다.

마침내, 소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다들 준비됐어요? 오늘 하루, 새벽의 향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좋겠다.”

나는 유리병 옆에 커피잔을 하나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이 공간, 오늘도 잘 이어질 수 있겠지’ 그런 생각만으로는 부족했지만, 향은 우리 셋을 이미 조용히 묶어두고 있었다.

밖으로 스며드는 어스름이 조금씩 물러가고 있었다.카페 내부의 공기가 잠시 출렁였다. 예열 단계의 커피머신에서 미세한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맞춰 하린이 연필을 잠시 멈췄다. 창밖을 힐끗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연다.

“오늘은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요.” 하린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면서도, 묘하게 설렘이 묻어 있었다.

소연이 테이블 모서리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분위기, 꼭 뭔가 시작되기 직전 같아. 익숙하지만 조금 낯선… 그런 감각.”

나는 커피를 그라인더에 천천히 넣으며, 미묘하게 바뀐 공간의 공기를 확인했다. 유리병 안에서 반사된 햇살이 테이블 위를 한 번 더 스치며, 금빛 선이 스케치북 모서리를 물들였다.

밖에서 작은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고리를 두드렸다. 아직 영업 전이라 자연스레 긴장이 번졌다. 문 넘어로 문수 형의 익숙한 목소리가, 밖과 안 사이의 경계에 가볍게 울렸다.

“도현아, 무슨 연구하냐? 안에서 향나서 죽겠다.”

나는 소리내어 웃으려다, 조심스럽게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피머신 소음, 하린의 연필 소리, 그리고 소연이 넘기는 종이의 바스락임까지—모든 소리가 순간 경쾌하게 포개졌다.

“금방 열어드릴게요, 문수 형! 오늘은 특별 메뉴 있어서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린이 바로 작은 미소를 담아 올려다봤다. 그 눈길엔 조용한 연대감이 흐른다. 소연이 거들듯 중얼거렸다. “오늘은 평소보다 손님들과 이야기 많이 나눠도 좋겠죠?”

나는 그 짧은 순간, ‘새벽의 향’이 진하게 공간을 감싸는 걸 느꼈다. 유리병 위로 새로이 쏟아지는 햇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오랜 손님들, 그리고 우리 셋의 미묘히 얽힌 하루. 아직 카페는 완전히 깨어나기 전이지만, 작은 기대와 설렘이 같은 결로 공간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나는 커튼을 조금 더 젖히며, 마침내 문을 열 준비를 했다. 문 너머의 움직임에, 우리 셋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곳으로 모였다—반쯤 열린 문, 그리고 그 너머로 피어오르는 오전의 기척.

이 순간, 우리는 잠시 모두 숨을 고르며, 곧 마주칠 새로운 하루를 기다렸다.문틈 사이로 불어드는 비릿한 아침 공기가, 커피머신의 온기와 어우러졌다. 내가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리자, 아직도 약간은 덜 깬 표정의 문수 형이 고개를 밖에서 쑥 들이민다. “오, 향이 범상치 않은데? 오늘 묘하네, 도현아.” 그는 늘 그렇듯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안을 훑어보았다가, 테이블 위 유리병을 발견했다.

“이게 뭔가. 약이라도 타놨냐?” 웃음이 묻은 말투. 소연이 테이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허리를 폈다. “오늘 컨셉 커피예요, 형님. 직접 맡아보세요. 새벽을 담았대요.”

문수 형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안으로 한 발 들어섰고, 하린은 무심한 척 스케치북 너머로 그 모습을 관찰하다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커피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그는 유리병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더니 한동안 숨을 깊게 들이켰다. “음... 진짜 신기하네. 어릴 때 새벽에 논둑 걷던 냄새랑 비슷하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잠시 끌렸다. 공간 안의 공기, 그리고 방금 막 도착한 한 사람의 기억이 묶여 새삼 짙어지는 느낌. 평소 같았으면 흘려보냈을 농담조의 말이었지만, 오늘은 그 말마저 차분하게 공간에 스며든다.

내가 머그컵에 막 갈아낸 샷을 내리기 시작하자, 기계에서 치익― 작고 단호한 소리가 났다. 진동처럼 우리 사이를 가로지른다. 하린은 다시 연필을 들어 문수 형의 굵은 눈썹과 커다란 손을 빠르게 베껴낸다. 연필선이 오늘따라 더 과감하다.

“문수 형도 초상화 한 장, 곧 완성될 것 같네요.” 내 말에 하린이 작게 웃었다.

소연은 시간표를 잠깐 덮고 주변을 둘러본다. “오늘은 그냥 아침 손님도, 전시 손님도 다 섞여서 자연스럽게 흘렀으면 좋겠어요. 부담 없는 분위기로.”

조심스럽게, 나는 산뜻한 산미가 강조된 원두를 커피 잔에 추출하며, 한 켠에서 실눈을 뜨고 핸드드립 포트에 물을 보충한다. 그 사이에 문 밖에는 할머니와 다른 마을주민 몇 명이 더 모이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문 바닥에 서서히 깔렸다.

말들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서로의 감각을 조율하듯, 가벼운 긴장과 익숙한 안도감이 교차했다.

밖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문틈을 타고 잠시 번졌다. 그리고, 등 뒤로 커피머신의 첫 포터 필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자리에 끼워지는 찰나― 누군가 또다시 문을 툭, 두드렸다.

이번엔 아주 낮고 조용한, 망설임이 섞인 노크 소리였다.

우리 셋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하린의 연필도 딱 그 자리에 멈췄고, 소연의 손끝이 노트 위에서 정지했다. 나는 컵을 놓으며 잠시 가만히, 누가 서 있을지 상상했다.

공간 전체에― 조금 전보다 더 미세하고 선명한 기대감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나는 손에 머그잔을 쥐고, 잠깐 호흡을 고른 뒤 조용히 문 쪽을 바라봤다. 낯익은 현관문 유리 너머로는 아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그저, 어둡고 짙은 나뭇잎 그림자가 슬며시 안으로 흘러들 뿐.

다시 조심스럽게, 두 번째 노크 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이번엔 처음보다 조금 더 확고한 울림—누군가 망설이면서도 용기를 내 문을 두드리는 움직임이었다.

문수 형이 나직이 말했다. “낯선 손님인가?” 문턱 가까이 발을 멈추고, 습관처럼 창밖을 엿본다. 카페 안을 감싼 새벽의 향기, 그리고 안팎을 잇는 문틈 사이로 잠깐 아주 얇은 정적이 흐른다.

나는 잠시 눈짓으로 하린과 소연을 훑었다. 하린은 아까보다 조금 더 단단한 표정으로 연필을 쥔 손을 멈췄다. 소연은 두 손을 천천히 모으고, 무언가 속으로 한 번 계산하는 눈빛이다. 우리의 숨소리마저 조심스레 얽혀 있었다.

“도현 씨, 열어볼까요?” 소연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향했다.

문 가까이 다가가 미약하게 떨리는 숨을 참았다. 손잡이에 닿은 손끝이 차가웠다. 문 너머 작은 실루엣 하나—키가 그리 크지 않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손에는 뭔가 조그마한 꾸러미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문을 살짝, 아주 조금 밀어 열었다. 바깥 아침공기와 ‘새벽의 향’이 부딪치며, 찰나의 시차로 유리 너머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혹시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

낯설고도 어딘지 조심스러운, 낮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내 곁에서 하린이 미묘하게 시선을 들었다. 소연은 여전히 노트 위에 손을 올린 채 미동도 없었다. 새로이 찾아온 이 첫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천천히 파동처럼 흔든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직 자리 많아요. 어서 오세요.”

그 순간, 카페 안 모든 소리와 향기, 아침의 빛과 기대가 잠시 한데 모였다—이 작은 순간에, 누군지 모를 새 손님과 우리 셋의 하루가 또 한 겹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문턱을 넘으며,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안고 있었다. 운동화에 묻은 이슬,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손끝.

슬며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카페 안은 또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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