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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1화-고향으로 돌아온 바리스타, 이도현

selee

내장산 산책길에 서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의 따뜻한 온기가 차가운 아침 공기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무 벤치에 앉아 보온병을 열자 갓 내린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오늘 아침 로스팅한 과테말라 원두의 은은한 꽃향기와 달콤한 초콜릿 향이 공기 중에 퍼졌다. 첫 모금을 들이키자 입 안 가득 부드러운 산미가 감돌았다.

"아직도 이런 걸 하고 있네."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서울에서 일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매일 아침 이렇게 산책길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 당시에는 오픈 준비에 쫓겨 커피 맛조차 제대로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햇살 사이로 비치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이런 순간들이 내가 정읍으로 돌아온 이유였다. 커피를 통해 사람들과 진정한 소통을 나누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되찾고 싶었던 바람.

보온병에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오늘 이오일스페이스에서 있을 일들을 떠올렸다. 하린이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소연은 다음 주 문화행사 기획으로 분주할 터였다.

"도현 씨, 역시 여기 계시네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린이 스케치북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어제도 늦게까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아침부터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참 한가해 보이죠?"

"아니요, 부러워요. 저도 이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린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스케치북에는 완성되지 않은 드로잉들이 가득했다. 지난 주부터 준비하고 있는 전시 작품들이었다.

"커피 한 잔 더 있어요. 마실래요?"

보온병을 건네자 하린이 고맙다는 듯 받아들었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멀리 보이는 산자락을 바라보았다. 아침 안개가 걷히며 점점 선명해지는 풍경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조금씩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어제도 늦게까지 작업하신 것 같네요."

하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여전히 물감 자국이 남아있었다.

"네... 자꾸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잡히질 않아요."

스케치북을 펼쳐 보여주는 하린의 눈빛에는 불안과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페이지마다 같은 구도를 조금씩 다르게 그린 흔적이 보였다. 마치 완벽을 향한 끝없는 시도처럼.

"가끔은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요. 너무 가까이서 보면 오히려 전체가 안 보일 수 있으니까요."

내 말에 하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멀리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린도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스케치북을 펼쳐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가 찾던 건 이런 거였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손끝에서 날아오르는 새들의 모습이 자유롭게 펼쳐졌다. 평소의 꼼꼼하고 세밀한 터치가 아닌, 즉흥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선들이었다.

보온병의 마지막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우리는 잠시 말없이 그 순간을 함께했다. 아침 햇살이 조금 더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려진 건 처음이에요."

하린이 스케치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긴장감 대신 작은 설렘이 묻어났다.

"아마도 이오일스페이스가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사람들이 와서 자연스럽게 숨을 쉬고, 이야기하고..."

말을 이어가던 중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소연이었다.

"도현 씨, 지금 카페 앞에 계신가요? 오늘 아침 일찍 배달된 게 있어서요."

전화를 끊자마자 하린이 궁금한 듯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새로 주문한 원두가 왔나 봐요.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요."

일어서려는 순간, 하린이 스케치북을 다시 펼쳤다. 방금 전 그린 새들의 스케치 옆에 무언가를 빠르게 덧그렸다.

"이거... 제 다음 작품의 시작이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보여준 스케치에는 새들과 함께 커피잔의 형태가 어우러져 있었다. 자유로운 선들이 만들어낸 의외의 조화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오늘의 이오일커피를 어떻게 내릴지 떠올렸다.나는 스케치북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여, 새와 커피잔이 맞물린 그 이미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한 줌의 햇살이 스케치 위에 퍼지자 연필 선이 더욱 따뜻하게 빛났다. 하린은 손끝에 남은 물감 자국을 무심코 문지르며 옆을 살폈다.

"도현 씨는 오늘 어떤 커피를 내릴 예정이에요?"

하린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아마 오늘은 새벽 공기 같은 산뜻함을 강조하고 싶어요. 약간 더 밝은 산미로, 커피 향이 주변으로 퍼지는 느낌처럼요."

그 말에 하린이 작게 웃었다. "저도 오늘 그려진 이 선처럼 자유로운 데로 가보고 싶어요. 근데 막상 캔버스 앞에만 서면, 다시 움츠러드는 제 자신이 너무 익숙해서... 그래서 한동안 완성 못 한 그림도 많은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하린의 불안이 단지 작품에 대한 집착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천천히 스케치북을 덮으며 덧붙였다.

"이오일스페이스에서 전시 준비하면서, 자꾸만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돼요. 아마, 제가 진짜로 원하는 그림이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서 그런 걸지도요."

"나는 하린 씨 그림에서 위로를 받은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완벽한 것보다, 지금처럼 솔직하게 그려내는 게 더 깊게 남죠."

내 말에 하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백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산책길을 따라 걷는 한 쌍의 노부부가 우리 쪽을 천천히 지나가며 인사를 건넸다. 하린은 작게 목례를 하고, 노부부는 자연스레 우리의 커피향에 코끝을 가져갔다. 잠시, 평온한 고요와 미묘한 긴장감이 함께 흘렀다.

스케치북을 품에 안은 하린이 나지막이 물었다.

"혹시, 이따가 가게에서 오늘 커피 내리는 거 옆에서 봐도 돼요? 새 스케치 옆에 커피 향도 같이 남기고 싶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요. 오늘은 하린 씨만을 위한 원두 향을 준비해볼게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하린의 시선이 스케치북 위에 잠깐 머물다 멀리 내장산 숲으로 옮겨졌다.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기대와 망설임, 그리고 아주 작은 불안의 그림자가 한순간 스쳐갔다.

우리는, 잠시 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딘가로 급하게 가고 싶은 마음과,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조용히 엇갈렸다. 바람이 불어와 잔가지들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저 멀리 카페 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누군지 쉽게 알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 둘 다 본능처럼 동시에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나는 아직 미련이 남은 듯 마지막으로 벤치에 뒷면을 쓸어보고, 보온병 뚜껑을 단단히 닫았다. 바람결에 하린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가, 그녀가 살짝 손으로 정리한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전과 다르지 않지만, 순간적으로 모든 감각이 한층 선명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뭔가 다를 거 같네요."

하린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스스로도 미처 정의하지 못한 기분이 얹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어요. 하린 씨 스케치처럼, 오늘은 무언가 조금은 달라질 것 같은..."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멀찍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좀 더 가까워졌다. 아마 소연일 것이다. 그녀는 일부러 서두르는 내색은 없지만, 손짓에 약간의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우리 슬슬 가야 해요, 안 그러면 소연 씨가 다음 스케줄 때문에 잔소리할지도 몰라요."

장난스럽게 말하며 하린을 먼저 산책길 앞으로 안내했다. 커피향이 옅어지며 공기 중에 흔적처럼 남았다.

걷는 동안, 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제일 완성된 그림엔, 오늘 벤치에서 느꼈던 이 공기까지 담고 싶어요."

나는 잠시 하린을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럼 오늘은 커피도, 공기도, 그림도 다 한데 모을 수 있겠네요."

둘 사이에 가볍고 익숙한 미소가 오갔다. 이 순간이 언제까지고 깨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 듯이—그러나 카페 앞, 더 또렷해진 소연의 실루엣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찰나, 하린이 다시 한 번 내 소매를 살짝 잡았다.

"도현 씨, 혹시… 가게 문 열기 전에 잠깐만 실내에서, 전시장 배치 같이 봐줄 수 있을까요? 혼자 있으려니 조금 막막해서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오늘은 커피 내리기 전에 하린 씨와 전시부터 시작해야겠네요."

둘이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어딘가에서 아주 약한 바람결에 카페 간판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소연의 음성이,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여기 두 분! 안 그래도 찾고 있었어요."

소연이 손에 담요처럼 싼 작은 박스를 안고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살짝 경쾌한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아마 오늘 들어온 배달의 무게 때문이겠지. 살짝 숨을 고르며 다가오는 소연을 바라보다가, 나는 하린과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춰 걸음을 옮겼다.

"방금 배달된 건데, 도현 씨가 직접 확인해주셨으면 해서요. 본사에서 온 원두 샘플도 몇 가지 더 왔어요."

소연이 조심스레 박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곧장 포장 테이프를 벗기려다, 하린을 보며 묻듯 미소 지었다. "이런 신상 원두 고르는 건 진짜 어려워요. 하린 씨, 오늘 향 보고 평가도 해 줄래요?"

하린이 잠깐 놀란 듯 하더니 금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맡아는 볼 줄 아는데, 커피맛 설명은 여전히 어렵더라고요."

말끝에 살짝 쑥스러운 웃음.

그 순간 소연이 작은 목소리로 툭 던졌다.

"솔직한 감상이 더 필요하죠, 일부러 전문가처럼 말 안 해도 돼요. 우리 손님들도 그런 이야기 원하니까."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은근한 기대감이 감돌았다. 박스의 끈을 천천히 푸는 동안, 카페 내부의 조용함이 바깥 산책길의 살랑거리는 바람과 섞여들었다. 창문 넘어로, 여전히 산에서 올라오는 햇살이 옅게 실내 의자에 번져 있었다.

"전시장 배치는, 일단 오늘 들어온 새 그림부터 출입구 쪽에 잠깐 세워볼까요?"

하린이 작고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펼쳐진 스케치북을 한 번 더 움켜쥔 그녀의 손끝에는 불안과 설렘이 교차해 있었다.

나는 마음속에서 잠시 동선을 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선 자연광이 잘 드는 쪽에 두고, 자세히 빛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같이 봐요."

소연은 박스를 내리고 허리를 폈다. "그런데 오늘… 도현 씨, 혹시 낮에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한 가지만 더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말에 하린과 나는 동시에 소연을 바라보았다. 순간, 방금 전까지의 여유로움에 작은 물결이 이는 듯했다.

나는 간단히 답했다.

"네, 오전엔 괜찮아요. 무슨 일이죠?"

소연은 한숨쯤 쉬려다 멈췄다.

"카페 오픈 전에, 우리가 다 같이 잠깐 이야기 나누는 시간 있었으면 해서요. 정말 단순한 내용인데요…"

그 망설임의 기운이 잔잔하게 퍼졌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쪽을 곁눈질하고, 하린의 얼굴에는 미묘한 긴장과 기대가 함께 스쳤다.

잠시, 세 사람 모두 말없이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문 쪽에서 들려오는 두드림 소리는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실내에 울렸다. 마치 평온했던 공기 사이로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카페 안의 시선이 일순간 집중됐다. 유리문 너머로 누군가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낯익은 지역 택배기사였다. 그는 늘 그렇듯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박스를 안고 서 있다.

"아, 오늘 또 뭐가 왔나 봐요." 소연이 실제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칼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외부의 시원한 공기와 함께 택배기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겸연쩍게 "수고 많으십니다" 인사하면서, 그는 곧바로 다음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고 상자를 처음부터 살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 대신 손글씨로 ‘새벽’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소연이 궁금한 듯 손가락 끝으로 박스 한쪽을 톡 건드렸다. "이건… 제가 주문한 물품 아닌데요. 혹시 도현 씨가 특별히 신청한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자의 봉인을 조심스레 풀었다. 하린도 스케치북을 옆에 내려두고 고개를 숙였다. 종이 속에 덮인 얇은 포장지, 그 아래에서 은은한 풀내음과 함께 작은 유리병 몇 개가 드러났다. 살짝은 납작하게 생긴, 라벨이 없는 투명 병들이었다.

"혹시… 시향 샘플 아닐까요?" 하린이 조심스레 묻자, 나는 병 중 하나를 들어 뚜껑을 따 보았다. 순간, 아주 섬세한 향이 퍼졌다. 커피의 그것과는 또 다른, 산책길 풀잎과 이슬이 섞인 듯한 싱그러움이었다.

소연이 한 병 더 들어 코에 가까이 댔다. "이거, 그냥 향이 아니라… 뭔가, 공간을 위한 특별한 무언가 같이 느껴지는데요?"

그때, 카페 안쪽 조명 위로 아침 햇살이 조금 더 짙어졌다. 박스에 들어 있던 메모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집었다. 작은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오일의 새벽을 담아. 오늘의 한 모퉁이에 두고, 향이 머무는 자리를 지켜봐 주세요.’

세 사람 사이에 다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손바닥 위의 쪽지가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듯 무게 있게 느껴졌다. 하린도, 소연도 잠시 숨을 멈추고 있었다. 컵에 남아 있는 커피 향과, 창밖에서 밀려드는 내장산의 이슬, 그리고 방금 받은 한 줌의 풋풋한 아침 냄새가 묘하게 교차되었다.

"도현 씨, 오늘은… 뭔가 정말 특별한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린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으로 유리병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세 명의 숨결이 작은 공간에 엉켜, 무언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장면이 곧 펼쳐질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창밖에서, 어스름이 다 사라지고 있었다.나는 잠시 손글씨 메모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봉투 안을 한 번 더 살폈다. 유리병 밑바닥에는 작은 드라이플라워 조각 한 점, 그리고 아주 연한 분필로 그린 듯한 동그라미 모양이 그려진 종이 조각이 깔려 있었다. 무심코 그 조각을 들어 올리자, 그 표면이 차갑게 손끝에 닿았다.

하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동그라미, 오늘 새 스케치랑 뭔가 이어질 수도 있을까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딘지 모를 두근거림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그 조각을 유리병 옆에 놓았다. “마치 의도한 것처럼, 네요. 아까 산책길에서 시작된 게 이렇게 또 연결이 되다니…”

소연은 조용히 유리병을 손에 쥐고, 빛에 비춰 보았다. 병 안에서 잔잔하게 부유하는 핑크색 꽃잎 몇 장이 환하게 빛나며, 내부에서 작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우리 공간에, 오늘 하루 이 향을 두고, 변하는 걸 직접 느껴 볼까요? 전시장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두면 어떨지…”

그 말에 나와 하린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리병을 들고 카페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가, 가장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지는 테이블 위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빛이 병을 통과해 테이블 위에 맑은 색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린이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스케치북을 다시 펼쳤다.

“잠깐만요…” 그녀가 연필을 꺼내 들고 무언가 속사포처럼 그려내기 시작했다. 소연은 카운터 너머에서 조용히 손에 쪽지를 쥐고, 그 문구를 다시중얼거렸다. ‘오늘의 한 모퉁이에 두고, 향이 머무는 자리를…’

카페 안에는 여전히 조용한 공기가 감돌았다. 멀리 나무 그늘을 비추며 초여름 햇살이 유리창 너머 길게 들어왔다. 이오일스페이스에서, 아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유리병 너머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가벼운 긴장감이 우리 셋 사이에 고요히 번졌다. 그 한순간, 아직 풀리지 않은 물음이 작게 우리의 시선을 엮고 있었다.하린이 테이블 위 유리병을 바라보며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 그녀의 손끝에서는 방금 전 봤던 병 속 꽃잎과 책상 위로 길게 드리워진 빛이 얽힌 선이 차분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창 밖에서 부는 바람에 간간이 햇살이 흔들리면, 유리병의 그림자도 하린의 종이 위에서 조용히 일렁였다.

"빛이… 그 위로 번지는 느낌이 참 신기해요." 하린이 소리내어 말했다. 소연도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순간은 진짜로 찍어두고 싶은데, 사진으론 다 담기지가 않아요." 소연의 말엔 살짝 아쉬움 대신 기대로 가득 찬 설렘이 실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카운터 뒤로 가 커피잔 세 개를 꺼냈다. 아침의 새로운 원두와, 방금 도착한 시향 병의 향을 어떻게 조합할까 잠시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소연이 다시 박스 안을 살피다 또 다른 작은 봉투를 꺼냈다. 갈색 종이에 둘둘 말린 그 봉투에는 익숙한 필체로 '열어볼 것'이라 적혀 있었다.

"이건…" 그녀가 망설이며 봉투를 펼쳤다. 안에는 작은 카드 하나와, 하얀색 천 조각이 고이 들어 있었다. 카드에는 짧은 문구, '새벽의 향이 공간을 바꿀 때, 여러분의 손끝에도 남을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잠시 세 사람이 함께 그 글을 들여다봤다. 그 작은 카드 한 장이 오늘의 공간에 뜻밖의 의미를 품은 듯, 모두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하린은 연필을 잠시 내려놓고, 손끝으로 천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우리, 이 천을 병 옆에 같이 두면 어떨까요? 그림자랑, 향이랑, 뭔가 더 오랫동안 머무는 것 같아서요."

내가 천을 병 옆에 조심스레 펼쳐두자, 소연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보다 훨씬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진짜 이오일스페이스만의 느낌이 나는 것 같아요."

창밖 나뭇잎이 햇빛에 더 짙은 초록색을 드러냈다. 작은 변화들, 아주 미묘한 감각의 교차 위로 정적과 기대가 솔솔 흐르고 있었다.

그때, 카페 입구 쪽 자동문이 미세하게 미동했다. 아직 오픈 전이라 바깥은 한산한데, 누군가 손잡이를 살짝 건드린 듯 작은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세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고 시선을 돌렸다.

공간을 가득 메운 은은한 향과 아침 햇살 속, 문 너머에서 또 다른 기척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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