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 아카데미아의 검은 체스판
소럴로소
복도엔 응급등만 켜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천천히 깜빡이며, 벽과 바닥에 기이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꽉 안은 채 조심스럽게 걸었다.
이 시간엔 아무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정상이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매일 걷던 복도인데, 오늘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복도 끝, 사물함 위에 낙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형광펜, 볼펜, 네임펜—아무렇게나 휘갈긴 흔적들.
누가 심심해서 낙서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자, 낙서 틈 사이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선들이 얽히고설켜 음악 기보처럼 보였고, 그 사이에 단어들이 숨어 있었다.
영어, 한자, 라틴어 같은 글자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끈 건, 한 문장이었다.
“Wetiko. See beneath the pattern. 12/03... 不在証明.”
나는 노트북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웨티코...’
며칠 전,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 정체불명의 노트.
페이지마다 반복되던 단 하나의 단어. 그 단어가 여기에도 있었다.
‘패턴 아래를 보라.’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데이터. 하지만 그 밑엔…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뜻일까.
12/03.
익숙한 날짜.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출입기록에 미묘한 시간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不在証明.
부재 증명… 누군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했다는 건가.
기록 속에서 자취를 완벽히 지운 사람.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기록실에서 확인한 데이터엔 구멍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완벽했다.
완벽한 데이터는 조작된 데이터다.
누군가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는데,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부재’가 아니라, 누락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라졌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굳게 잠긴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잡이엔 쪽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ENIGMA는 항상 내부에 있다.”
익숙한 문장.
작년 철학과 강의에서 교수님이 했던 말이었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시스템 내부에서 비롯된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이 노트북 안엔,
그 시스템의 ‘복사본’이 들어 있다.
누가 남겼는지도 모른 채 분석을 시작했고,
지금은 그 안에 갇힌 상태였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내 앞을 지나갔다.
소리 하나 없이.
복도 반대편 문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시간, 이 건물, 이 층엔
출입 허가가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눌렀다.
낡은 힌지에서 삐걱 소리가 짧게 났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검은 코트.
손엔 낡은 노트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며칠 전,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바로 그 노트.
“올 줄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네가 여기까지 올 줄.”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억양.
믿고 싶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그 이름.
마틸다 슈타이너.
그녀는 노트 표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Wetiko. ENIGMA. 처음부터 이건 네 손에 들어가야 했어.”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는 말보다 움직임이 증거가 되는 게임.
침묵이 복도 바닥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형광등이 깜빡일 때마다 그림자의 길이도 미세하게 바뀌었다.
마틸다가 노트를 펼쳐, 한 장을 내 쪽으로 넘겼다.
삐뚤한 격자 위에 검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시스템 밖에 존재하는 데이터는, 스스로 흔적을 남기지.”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너도 느꼈지? 누군가 일부러 틈을 만들고 있다는 걸.”
“지워졌는데, 연결은 남아 있는 사람. 그런 존재는 그냥 사라진 게 아냐.”
나는 노트 가장자리에 번진 잉크 자국을 손끝으로 훑었다.
거친 종이의 결이 살짝 걸렸다.
“흔적을 남긴다는 건,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는 뜻이겠지.”
마틸다는 조용히 웃었다. 짧고, 그러나 의미 있는 웃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아무도 믿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왼손이 내 노트북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우릴 보고 있는 ‘관찰자’가 있다면, 지금쯤 이 복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겠지.”
나는 반 발짝 물러서며, 응급등이 깜빡이는 쪽을 바라봤다.
노트북 화면 구석, 메타태그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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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름 없는 해시값 하나.
“…이걸 보여주려고 한 거야?”
내 질문에 마틸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짧게 끌어올렸다.
“그 반응. 바로 그게, 네가 가진 조각이라는 증거야.”
잠시 멈춰 있던 공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복도 전체가 조용히 긴장감으로 당겨졌다.
닫히는 문틈 아래, 그림자 한 줄이 스치듯 지나갔다.
“아키토. 어차피 누군가는 첫 수를 둬야 해. 내가 아니면, 네가.”
마틸다는 손끝으로 노트를 살짝 흔들었다.
내 데이터.
그녀의 암호.
아직 닫히지 않은 시스템.
이 짧은 거리.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이 자리.
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체스판을 떠올렸다.
숙소에서 가져온 나이트 하나를 손에 쥐고,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내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넌 내 편이야? 아니면 경쟁자야?”
마틸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코트 자락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 순간, 복도 끝 어딘가에서
미세한 신호음 하나가 들렸다.
등줄기를 타고 낯선 시선이 흘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다.
이득과 신뢰, 그리고 ‘진짜 문제’가 어디서 떠오를지는—
이제, 한 칸씩 전진하며 확인할 차례다.
나는 반사적으로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화면이 어둡게 깜빡였고, 익숙한 시스템 아이콘 아래로 낯선 코드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은 창 위에, 붉은 글씨로 경고가 떴다.
[connection unstable] — 연결 불안정.
마틸다의 시선이 내 손끝에서 화면으로, 그리고 다시 내 얼굴로 옮겨왔다.
말없이, 조심스럽게.
우리는 둘 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복도 끝에서,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삑—
신호음이 작게 따라왔다.
누군가… 아직 이 건물 안에 있다.
“네가 가진 건, 정확히 뭐야?”
마틸다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똑바로 내 중심을 찌르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손안에 쥔 나이트를 굴리며 잠깐 생각했다.
“네 해시값. 그거… 그냥 만든 게 아니지?”
그녀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실패한 코드야. 동시에 시작점이기도 하고.”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너희 시스템에도 비어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거.”
그 말에, 나는 노트북 자판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잠깐 떠오른 로그창.
곧 사라졌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경고가 있었다.
[INTERNAL NODE BREACH] — 내부 노드 침입 감지.
화면 위로 내 그림자가 어둡게 겹쳐졌다.
마틸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씻은 듯한 비누 향이 살짝 풍겼다.
“네가 여기로 올 줄 알았어.
그냥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야.”
내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경계심이 올라갔다.
“함정이야?”
내가 물었다.
“아니.”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신호야.”
마틸다는 노트북 옆에 작은 쪽지를 내려놓았다.
“이제부턴, 우리 둘 다 위험에 노출돼 있어.
누가 우릴 보고 있을지도 몰라. 관찰자든 누구든.”
나는 그 쪽지를 바라봤다.
낯선 숫자들, 그리고 라틴어가 섞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직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중요한 좌표일 수도 있다.
그때였다.
머리 위 형광등이 한 번 크게 깜빡이며 어두워졌다.
순간, 복도 저편에서
낮고 묵직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틸다는 몸을 돌려 그 어둠을 바라봤고,
나는 노트북을 끌어당기며 손에 힘을 줬다.
무언가가 있다.
우리 둘 외에,
확실히 다른 무언가 가 있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이며 천천히 빛을 되찾았다.
그 틈 사이로, 복도 끝 문 너머에서
사람 형체의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복도 끝, 이도윤의 검은 그림자가 마침내 그 앞에 섰다.
그의 존재감은 단순히 ‘인물’로 한정될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이 모든 시스템의 정점, 창조자, 그리고 교장이었다.
“이곳까지 잘 왔다, 아키토.”
이도윤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차가웠고, 그 속에 감춰진 지혜와 위압감이 한층 더 강하게 느껴졌다.
아키토는 한 걸음 물러서지 않았다.
“왜 여기 있는 거지?”
목소리 속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당신과 관련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의문이 들었어.
왜 그토록 완벽한 시스템에 빈틈을 두었냐고. 왜… 이 모든 걸 의도한 거냐고.”
이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아키토를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계획의 일환일 뿐이야.
너희가 쫓고 있던 그 흔적들, 그 불완전함은 그냥… 자연스러운 일.
시스템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 바로 그 완벽하지 않음 속에서 진짜 시스템의 본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키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냥 당신의 실험에 불과한 건가?”
이도윤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실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다.
너희가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아낼지를 지켜보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 순간, 아키토의 손에 든 체스 나이트 말이 눈에 띄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나이트 말이 반짝였다.
마치 의식처럼, 손끝에서 돌리며 말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이도윤의 시선이 그 나이트 말을 향해 고정됐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를 던졌다.
“체스는 항상 두 사람이 마주 볼 때, 그 끝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체스판 위에서 단 한 번의 실수가 패배를 불러오는 법이지.”
아키토는 잠시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이라 예상했단 거지?”
“그렇다.” 이도윤의 얼굴에서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체스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너희의 선택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단 한 칸을 두는 순간, 게임이 끝날 것이다.”
그의 말에 불길한 예감이 아키토의 몸을 스쳤다.
그 말 속에는 미래의 방향이 결정될 순간을 암시하는 무언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아키토는 다시 한 번 나이트 말을 손안에서 굴리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그 수를 둘 차례군.”
이도윤은 그의 대답에 차갑게 웃었다.
“그렇다. 너의 첫 수는 바로, 네가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순간, 아키토는 그 말을 듣고 전율이 일었다.
이도윤의 말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 게임의 규칙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이제 첫 수가 시작된다면—모든 것이 영원히 바뀌게 될 것이었다.

1화_시작의 평화, 경쟁의 시작점
아카데미아의 검은 체스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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