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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

5.기억의 불씨 Embers of Memory

세상을그리다.

주말 오후, 커다란 매끈한 캔버스 꾸러미를 든 학생들이 낡은 화방 문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골목 어귀의 느티나무 잎이 사각거리고, 누군가 킥보드를 타고 스치듯 지나갔다. 나탈리아가 뜨거운 빨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맨 앞에서 우리를 이끌었다.

“자, 낙엽집회소 그 골목까지 가요, 네?” 그녀가 번역기켜다 말고 귀에 어설픈 한국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등 뒤 학생들이 킥킥 웃는다.

나는 묵묵히 앞장을 섰다. 땅을 오래 디딘 신발 밑창이 자꾸 벽돌 틈에 끼었지만, 익숙한 길이었다. 골목은 계단처럼 낮아지고, 어디선가 숯불 냄새가 살짝 배어 나왔다.

“선생님, 여기 그림 좀 보세요!” 파란 머리띠 쓴 남학생이 담벼락에서 색이 바랜 벽화를 가리켰다. 소방차 그림 아래, '1988'이라고 큼큼 새겨진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고무 타이어 냄새에 휩싸인 그 풍경이, 내 속 어딘가를 계속 건드렸다.

나는 그냥 고개 한 번 끄덕였을 뿐이지만 나탈리아는 벌써 지갑 속 코닥 필름 카메라를 꺼내 벽화에 바짝 다가섰다. “이런 거, 너무 좋아. 진짜, 도시의 기억? 다 있어요.”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오래된 표지판, 전봇대에 덕지덕지 붙은 실종 아동 스티커, 금간 창틀 같은 것들을 우르르 찍기 시작했다. 누구는 작은 코너에 쭈그리고 앉아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장 선생님, 이거 소방 마크죠?” 누군가 오래된 철문 손잡이에 부엉이처럼 매달린다. 코팅 매끈한 복도와는 너무도 다른, 시간에 닳아버린 표식. 나도 모르게 잠깐 걸음을 멈췄다.

“음. 옛날엔… 다 저런 거 달려 있었지.” 입 안에서 말이 뚝뚝 끊겼다.

나탈리아가 다르게 본다는 듯 내 옆에 붙었다. 그녀는 내가 한참 골목 어귀를 바라보는 걸 눈치채곤, 살며시 내 어깨 너머로 창가를 가리켰다. “여기, 왜 멈췄어요?”

나는 대답 대신, 창문이 녹아내렸던 흔적을 손끝으로 짚었다. 검게 탄 나무틀, 불길이 지나간 자리. 예전, 화재였던 그 골목집이 떠올랐다. 어떤 아이가 울음도 없이 품에 안겨 있던 그 밤. 아무도 알지 못한, 그냥 채워넣던 상처들을 나는 그림에만 담았다.

나탈리아가 조용히 핸드폰 음성기록을 켜더니, 내 손등을 살짝 흘끗 봤다. “할아버지, 이거… 감정이 있어요. 손도, 여기, 같이 들어요. 왜 안 그리고 있었어요?”

나는 뭐라 답을 할 수 없었다. 자꾸만 언어가 혀 밑에서 멈추고, 내가 침묵하는 동안 주위 아이들은 하나둘씩 우리와 다른 시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저쪽 낙엽집회소 카페 앞 평상에선 작은 모임이 열렸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협동조합 거치대에 걸린 사진들을 정성스레 닦고, 아이들은 서로 소곤소곤 얘기를 나눴다.

“이 동네… 불길 있었던 이야기, 더 듣고 싶어요. 예술이, 이런 상처에서 탄생하는 거 맞죠?” 나탈리아가 또박또박 물었지만,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나는 한참 눈을 감았다 떴다. “몰라. 그냥… 남아 있는 게 그거뿐이라서 그렸지. 예술이 뭐든, 그건 네가 찾고 그리는 거다.”

나탈리아가 잠시 조용했다. 그녀의 녹음기에는 하마터면 새어나올 뻔한 내 한숨마저 담겼을지 모른다.

카페 유리창 안쪽엔 낡은 소방 헬멧이 장식처럼 걸려 있었다. 그 위에 먼지가 햇살에 반짝이다가, 아이들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학생들 중 한 명이 락카로 커다랗게 ‘기억의 불씨’라고 쓴 종이 피켓을 꺼내 들었다. 낙엽의 그림자, 오래된 영웅의 마크, 그리고 소음 속에도 사라지지 않는 숨소리—골목의 조각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다.

그 틈에서 나는 한 번 더, 골목 끝을 바라봤다. 화상 자국이 슬며시 따끔거렸고, 숨을 쉬는 것도 잠시 늦춰졌다.

“다음엔…”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였다.

나탈리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진짜 이야기, 우리 다 들을 수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꾸만, 결코 가볍지 않은 어떤 조각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골목 위로 학생들이 흩어지고, 바람이 한 차례 스치자 오래된 벽화가 색 바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열쇠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누군가, 이 길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이끌 것 같았다.바람에 풀린 낙엽 소리가 바닥을 스쳤다. 멀리서 찍히는 카메라 셔터음과 학생들 사이의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구부러진 골목 담백을 따라 시선을 내리고, 손아귀 안에서 열쇠를 천천히 돌렸다.

나탈리아는 내 옆에 머물러, 이따금 그 특유의 청명한 숨소리를 내며 기다렸다. 그녀가 코끝에 맺힌 낙엽을 조심스럽게 치우면서 다시 말했다. “장 선생님, 이 길—옛날에 불난 거, 다 기억해요?”

나는 입술을 한 번 핥았다. 내 목소리가 골목 속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몇 개는 남지.” 그 말에, 나탈리아가 번역기 위에 손가락을 얹고 곧장 대답이 이어질 틈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남학생이 작은 노트를 꺼내 내 손등을 훔쳐봤다. 벽화와 화상 자국 사이, 헐거운 낡은 앞치마와 굵은 선. 그의 눈빛엔 쉽게 넘기지 못한 조심스러움이 묻었다. “선생님, 이 자국… 많이 아팠죠?” 반쯤 속삭이듯,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골목 끝 낙엽집회소 지붕과 그 아래 그림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사이, 나탈리아가 핸드폰으로 벽화와 내 손등을 번갈아 찍었다. 플래시가 깜빡이고, 그 이미지들이 작은 화면 위에서 서로 얽혔다.

“이런 거, 다 예술이에요.” 나탈리아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도, 골목도, 다 같이요.”

나는 그 말에 잠깐 시큰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그랬던 거지, 뭔가 대답을 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 눈은 내 오래된 손길과 골목 끝을, 그리고 아직 그림이 남아 있는 창가를 멈추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학생들 중 한 명이 벽 그림 앞에서 “이 색, 선생님 직접 칠한 거 맞아요?” 묻자 나는 그냥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 속엔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먼 기억이 조금 출렁거렸다.

나탈리아가 내쪽으로 한 발 더 다가오며, 가만히 물었다. “다음에는… 뭐 그리고 싶어요?”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깊게 들이켜며, 내 안에서 또 한 번, 오래된 불씨가 조용히 흔들렸다.

그 순간, 골목 안쪽에서 잦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작은 그림자 한 무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낡은 협동조합 표지 아래에 서성이던 또 다른 학생들이 우리를 힐끔 바라본다. 나는 열쇠를 꼭 쥔 채, 잠시 그들을 응시했다.

나탈리아의 핸드폰 화면엔 방금 찍은 벽화와 내 손이 겹쳐 있었다. 그녀가 그걸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한국어로 중얼였다. “진짜 이야기는 손에 남아요. 장 선생님, 우리—같이 그릴 수 있어요?”

나는 한참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말없이. 골목 끝에 흩어진 빛과, 가을 바람이 우리 사이의 조용한 틈을 서서히 메워 갔다.

멀리서 나즈막한 종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나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어깨를 폈다. 내 안에서, 오래 전부터 묻혀 있던 이야기 한 줄이, 조심스럽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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