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그만한 작업실안에...Quiet Workshop...
세상을그리다.
아침 햇살이 화방 유리창 위로 천천히 번진다. 물감이 뒤섞여 얼룩진 작업대 위엔 아직도 밤새 굳은 붓 몇 개가 쌓여 있다. 나는 원래 이 시간이면 누군가 찾아올까 싶어 굳이 문을 열지 않는다. 근데 오늘은, 어제 그 젊은이들 때문에 혹시나 싶어 건너편 골목을 한 번 더 훑는다.
“할아버지, 이 그림... 손이, 왜 이렇게 굵어요?” 나탈리아가 작업대에 기대선 채, 내 손을 슬쩍 바라본다. 그녀 손톱에 낀 검은 물감 자국이 낡은 내 앞치마 자국이랑 묘하게 닮았다.
나는 괜히 손을 옆으로 밀어둔다. “원래 이렇다. 붓질 오래 하믄 굵어진다, 뭐.”
나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진한 눈빛으로 내 화상 자국을 훑는다. 근데 그걸 막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놔둔다. 학생 하나가 스마트폰으로 내 캔버스에 바짝 들이대더니, “장재만 선생님, 이건 팝아트라기엔... 다르지 않아요?”라고 툭 내뱉는다. 말끝 어딘가 낯선 흥분이 감돈다.
나는 그 말에 그냥 어깨 한 번 들썩인다. “다르면 좋은 거지. 요즘엔 다 똑같아서리.”
옆에서 머리를 짧게 묶은 학생이 그림을 바라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근데 할아버지가... 그 소방관 맞죠? SNS에서 봤어요. 진짜예요?”라고 물어본다.
애들이 이런 걸 묻는 게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내 심장이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인다. 나는 마른 목을 골골거리며 “그냥 옛날 얘기다”라고 짧게 말한다. 말하고 나면, 그림 속에 숨긴 불길이며 검은 얼굴들이 하나씩 뒤엉켜 피어오르는 것 같다.
나탈리아가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내 그림 속 불길을 따라 그은 듯한 선을 짚는다. “이거... 누군가를 위해서 뛰었어요? 아니면... 그냥 두려워서?” 그녀의 한국어는 서툴지만, 망설임과 진심이 섞여 있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다문다. 개스 오븐이 터지는 소리며, 잿더미 사이에서 퍼벅퍼벅 걷던 밤들이 머릿속에서 돌돌 굴러간다. 그래도, 감정을 다 풀어놓기엔 아직 이르다 싶어 그냥 씩 웃는다. “사람은 다 두려운 거여. 두려워도, 할 일 있으면 해야 된다.”
그녀가 내 눈을 오래 바라보다가,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옆의 학생들은 각자 그림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으며 속닥거린다.
“진짜 저런 색, 우리 아빠는 한 번도 못 봤을 거야.”
“이상해... 슬픈데, 멋있다.”
작은 화방 안엔 어지러운 감탄과 적막이 뒤섞인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물감통을 만지작거릴 뿐인데, 그새 사진 찍는 셔터 소리며, 희미한 웃음소리가 구석구석 퍼진다.
나탈리아가 한 발짝 다가온다. “할아버지, 다음엔... 이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음악도, 사진도, 그리고 그림도...” 잠깐 멈춘 그녀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우리... 같이 해볼래요?”
나는 대신 붓을 한 번 돌리고, 앞치마 끈을 매만진다. 등 너머로 창 밖에 보이는 골목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학생들끼리 서로 카메라를 보여주며 감탄과 낯선 부끄러움이 번진다.
오래간만에, 나도 누군가의 관심 속에 숨이 막힌다. 귀에 익은 고요 대신, 작은 파문이 화방 전체로 번지는 걸 느낀다. 문 틈 사이로 바깥 사람들이 화방 안을 힐끔거리는 것도, 그림 속 불길처럼 어둑어둑한 긴장감을 더한다.
나는 잠깐 뒤로 물러서며, 날카롭고 생생한 새벽 냄새 사이에서 학생들의 산뜻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 사이, 나탈리아가 한동안 내 그림 옆에 앉아 묵묵히 사진을 정리한다.
종이 위엔 아직도 미완의 붉은 선이 울퉁불퉁 남아 있다. 나는 그 선을 따라 입꼬리를 느리게 올리고, 천천히 다음 붓질을 준비한다.그 틈에, 구석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학생 한 명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넨다. “할아버지, 혹시... 이 그림들, 전시할 생각 있으세요? 학교 작은 갤러리 말이에요. 그냥, 우리끼리라도.”
내 손끝이 잠시 멈춘다. 못 본 척 붓을 털지만, 그 말이 벽을 타고 천천히 화방 안을 맴돈다. 다른 학생들도 그 말에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SNS, 학교, 전시회—그런 낱말들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내겐 몹시 이질적이다.
나는 툭, 짧게 숨을 토한다. “여 여기서 그리면 됐다 아이가. 그라모 됐다.” 어쩐지 목소리가 얇아지는 걸, 아이들도 감지한 모양이다.
나탈리아는 내 앞에 더 가까이 앉는다. 노트북을 무릎 위에 얹고, 조그마한 마이크를 내 쪽으로 밀어둔 채 망설인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입을 연다.
“할아버지, 이야기... 필요해요. 우리도, 다른 사람들도. 그냥 보여주고 싶어요. 여기, 이 불씨... ‘기억의 불씨’라고 했죠? 다, 다 알게.”
나는 한참을 그 눈빛 속에 숨어있는 기운을 바라본다. 내 속에 겹겹이 쌓인 기억들이 조용히 뒤척이는 느낌. 학생들의 스마트폰, 카메라, 얇은 손가락들—모두가 내 그림과 내 손마디를 훑는다. 이 작은 공간이 금세 낯선 무대로 변해버리는 듯싶다.
밖에서 누군가 성급히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여기야, 너도 와봐” 작게 외친다. 화방에 한 줄 더 늘어난 그림자, 바깥 골목에서 웬 어린 학생 둘이 머뭇거리며 문턱을 넘기 전, 나는 나도 모르게 손등에 묻은 파란 물감을 앞치마에 한 번 더 문지른다.
그 순간, 나탈리아의 휴대폰에서 저절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또 한 번 퍼진다. 금방이라도 그 목소리와 빛, 그리고 내 그림이 동시에 세상 밖으로 흘러나갈 듯했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붉은 물감 뚜껑을 천천히 연다. 아침 햇살이 새롭게 캔버스를 비출 때, 미완의 붓끝 위로 젊은 시선들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제, 이 작은 공간이 또 어떤 얼굴로 변할지—아직 아무도 모른다.

1.고요한 작업실 Quiet Workshop

3.묵직한 가방Heavy b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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